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화 투쟁 (문단 편집) === 전개 === 먼저 선전포고를 한 측은 [[가톨릭]]이었다. [[교황]] [[비오 9세]]가 '진보, 자유주의, 근대 문명과의 타협을 거부할 것'을 신자들에게 지시하자, 이에 비스마르크는 [[1871년]] 7월 프로이센 왕국 내 문화청의 가톨릭 부서를 철폐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가톨릭 [[신부(종교)|신부]]들에 대한 정부의 관리를 강화할 것을 명시한 법안[* 이 법에는 가톨릭 [[사제]]들이 정치적으로 불온한 언동을 할 경우 처벌을 가할 수 있게 명시됐다.]이 라이히스탁에서 통과됐다. 이듬해인 [[1872년]]에는 가톨릭 [[수도회]]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었던 [[예수회]]의 독일 내 활동을 금지한 데 이어, [[1873년]]에는 악명 높은 5월법(Mai Gesetz)를 통과시켜버린다. 5월법으로 인해 독일 내에서 가톨릭 [[신부(종교)|신부]]가 가톨릭교회로부터 [[성품성사|사제서품]]을 받으려면 독일 정부가 주관하는 역사, 철학, 문학 시험[* 정부 측에서는 이를 문화시험(Kulturexamen)이라고 명명했다.]을 통과해야 했으며, 이를 어길 경우 징역형과 고액의 벌금이 부과되어 정부의 교회 통제가 한층 강화됐다. 비스마르크의 강공은 그칠 줄을 몰랐다. 1874년 공교육 기관에서 종교 교육이 오로지 국가에 의해서만 실시될 수 있도록 규정됐고, [[세례성사]], [[견진성사]], [[혼인성사]], [[병자성사]] 등의 [[7성사]]를 교회가 주관하는 것까지도 막아버린다. 가톨릭 탄압이 절정에 이르렀던 1875년이 되면 독일 내 모든 [[수도원]]을 폐지[* 유일한 예외가 바로 병원의 역할을 맡던 [[수도원]].]한 데 이어 [[교황령]]에 거주하던 [[독일 제국]] [[외교관]]까지도 철수하여 독일 제국과 [[교황령]]이 단교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해진다. 비스마르크의 이러한 정책에 대해서 [[독일]] 내 가톨릭 세력은 격렬히 반발했고, 그 덕에 1870년대 후반이 되면 대다수의 [[주교]]들이 추방되어서 독일 내 [[교구]] 중에서 주교가 존속한 교구가 주교가 추방된 교구보다 적을 지경이었다.[* 총 [[교구]] 중에서 3분의 1 정도 되는 수의 교구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가톨릭 세력은 모진 탄압에도 [[교황]]을 중심으로 굳건히 단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가톨릭 중앙당|중앙당]]의 세는 문화 투쟁이 시작되기 전보다 오히려 커져갔고, [[중국천주교애국회|급기야 공석이 된 주교 자리를 정부가 임의로 임명]]하려고 시도했다.[* 주교직은 [[교황]]의 권한으로 임명되는 성직이니 가톨릭교회가 분노할 만 했다.] >1878년 말에 프로이센의 가톨릭 주교 중 절반 이상이 망명을 하거나 투옥되었다. 1,800명이 넘는 사제가 감금되거나 망명했으며 1,600만 마르크의 가치가 넘는 교회 재산이 압류되었다. 1875년 들어 첫 4개월 동안에만, 사제 241명과 가톨릭 신문사 편집장 136명, 가톨릭 평신도 210명이 벌금을 물거나 투옥되었으며 신문사 20곳이 몰수되었다. 또 가톨릭 건물 74개 동이 수색당했고 가톨릭 정치 활동가 103명이 추방되거나 억류되었으며 가톨릭 협회와 클럽 55개가 폐쇄되었다. 1881년에 가서는 프로이센의 전체 교구 중에 사제가 없는 곳이 4분의 1이나 되었다. 이것이 수 세대 동안 독일의 정치와 공공생활의 골격을 형성한 '문화투쟁'(Kulturkampf)이 절정에 올랐을 때의 프로이센 모습이었다.[* (책 속 주석)Margaret Lavinia Anderson, ''Windthorst. A Political Biography'' (Oxford, 1981), 특히 pp. 130-200; David Black bourn, ''Marpingen: Appartitions of the Virgin Mary in Bismarckian Germany, 1871-1887'' (Oxford, 1993), pp. 106-20; Ronald J. Ross, ''The Failure of Bismarck's Kulturkampf. Catholicism and State Power in Imperial Germany, 1871-87'' (Washington, 1998), pp. 49,95-157.] >이 시대에 유럽에서 종파 문제로 갈등을 겪은 국가가 프로이센만은 아니었다. 1870년대와 1880년대에 유럽 대륙 전역에 걸쳐서 가톨릭과 세속 자유주의 운동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었다. 그런데 프로이센의 경우는 유별났다. 다른 어디에서도 가톨릭 기관과 구성원들을 그토록 체계적으로 억압한 곳은 없었다. >---- >-크리스토퍼 클라크,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91190853026&orderClick=LEa&Kc=|《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1쪽 이러한 억압은 가톨릭 바깥에서도 반발이 있었다. >1870년대 중반에 가서, 자유주의 좌파는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이 운동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갈수록 급진적인 반교회 운동의 조치는 독일 보수주의에서 '성직자' 분파를 형성한 많은 프로테스탄트에게 불안감을 주었다. 이들은 '문화투쟁'의 진정한 희생자는 가톨릭 교회나 가톨릭 정치가 아니라 종교 자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크리스토퍼 클라크,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91190853026&orderClick=LEa&Kc=|《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5-766쪽 그 동안 정부와 가톨릭 사이의 다툼을 ~~물건너 불구경~~ 관망하고만 있던 [[프로테스탄트]]들까지도 불안감을 느끼고 거세게 반발하면서 비스마르크를 당황시키기 시작했다. 게다가 자유주의 좌파도 문화투쟁을 반대했기에, 결과적으로 '가톨릭+프로테스탄트+자유주의 좌파'라는 도저히 어울리지 못할 것 같은 조합이 연대하여 문화투쟁을 반대하게 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